1202호 현관문

10년 만에 큰고모님과 상봉 후, 직접 집필하신 기독교 신앙 서책 4권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비슷한 류의 간증집들이 먼지 쌓여가는 중이라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같은 날, 인터넷으로 주문했던 "만들어진 신", "이기적 유전자", "만들어진 전통",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축의 시대" 등 화려한 명성의 세계적인 서적 8권이 도착했고, 저는 설레었습니다.

당일 저녁, 새로 입고한 책들의 사진을 찍고 읽을 순서를 정하는 기념 의식을 가졌습니다. 평소 같으면 구매한 책들을 먼저 보았겠지만, 이상하게도 4권의 책 중 "나는 날마다 기적을 경험한다"라는 책이 눈에 쏙 들어왔습니다. 칠순이 훌쩍 넘으신 집안 어른의 대표적인 에세이집! 이 책이 1번으로 정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

240페이지의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었습니다. 좋아하는 주제라면 2시간 이내에도 정주행할 수 있는 분량이었지만, 보기 직전까지도 '몇 페이지나 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끊임없이 맴돌았습니다.

첫 장을 열었습니다. 예상은 적중했지만, 그 이유는 전혀 달랐습니다. 마치 출근길 자유로를 운전하는 것처럼 가다 서다를 반복했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책을 보다가 눈시울이 붉어진 경험은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갑자기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거친 산이 높은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눈물로 뒤범벅이 된 얼굴로 흐느적거리다 정신이 들자, 무의식적으로 되풀이했던 이 곡의 정체가 궁금해졌습니다. 유행가가 아닌 것은 분명했지만 좀처럼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필사적으로 기억을 되짚은 끝에, '맞아! 내 영혼이 은총 입어!'라는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찬송가책을 캡처한 악보와 함께 업로드된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훑어보니 제가 부른 것은 3절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였습니다. "거친 산"이 아니라 "높은 산"이었더군요! 찬양을 한 지가 너무나 오래되어 순서와 가사가 뒤죽박죽이었습니다.


판도라의 상자

25년 전, 온몸을 휘감고 있었던 세마포를 가차 없이 벗어던졌습니다. 빨간 십자가 로고가 새겨져 있던 그 삼베옷은 코 풀고 난 휴지처럼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쳐졌습니다. 낮에는 백조가 되고 밤에는 박쥐가 되어 살아가던 이중적인 삶, 지킬 박사 안에 숨어지내야 했던 하이드는 쇼생크를 탈출한 팀 로빈스처럼 마침내 두 손을 번쩍 들고 하늘을 향해 포효했습니다.


투명색 비밀 커튼

어렵사리 첫 장을 연 것과는 달리, 마지막 책의 끝 장을 닫기까지는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보는 것 마냥 그대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차이점이라면 또 다른 기적 속에는 눈물과 찬양이 혼합되어 끊임없이 분출되었다는 것입니다.

첫 권을 읽을 때만 해도 잠시 이러다 말겠지 했습니다. 그런데 계속되었습니다. 심지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말입니다. 찬양이 흘러나왔고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이게 뭐지?'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은 것도, 사업 부도로 절망에 빠진 것도, 아내가 바람나 가출한 것도, 아들이 살인죄를 저지른 것도 모두 아니었습니다. 도저히 내가 울었던, 그것도 그리도 반복해서 우는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극단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 주인공, 절대자를 향해 부르짖는 처절한 절규와 응답, 그리고 회개! 내게는 회심 스토리에 있어야 할 분명한 동기가 없었습니다.

[며칠이 흐른 어느 날, 찬송을 부르며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소리가 들렸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계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다메섹 도상으로 가던 그 말씀! 이는 분명히 내가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와 같은 드라마틱한 음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랬다면 생동감이 넘치면서 훨씬 감동적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글을 쓰려고 하니 뭔가 부족하고 밋밋했습니다. 그래서 비유적으로라도 어느 정도 각색을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만약 이것이 개인 블로그에 올리는 창작 소설이었다면 그렇게 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쓰는 글은 간증문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진실하고 솔직해야 하는.

다만, 한 가지가 있긴 있었습니다. 책을 보면서, 찬양을 부르면서, 울면서,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용솟음치듯이 터져 나왔던 한 가지 고백!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정말! 태어나서 처음입니다. 내가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여겨진 것은. 느낌이나 감정과 같은 것이 아닌 죄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I am 인간난지도!!!

유튜브로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전 세계로 생중계되고 있었습니다. 제목은 '당신만 알고 있다고 착각했던 것들'.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까발려지는 천국판 트루먼쇼의 짐 캐리가 바로 나였습니다.

실존에 대한 처절한 인식과 심연의 끝자락에서 흘러나오는 영혼의 탄식! 무릎을 꿇었습니다. 제대로 울었습니다. (그 어떤 말로도 형용하기 힘들어서 가져다 쓴 말이 제대로이다) 굳이 수학적으로 비유를 들자면 성인이 된 후에 흘린 눈물을 다 합해도 비교가 안 될 만큼 그냥 쏟아져 나왔습니다. 스스로 바알이 되어 25년 동안이나 우상으로 살았던 호모데우스는 마땅히 있어야 할 제자리로 내려왔습니다.


대반격의 포구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죄가 문제였습니다.

"정말 뻔뻔스럽구나, 거기가 어디라고 다시!" "너 같은 죄인이 무슨 자격으로?" "너는 이제 우리 사람이야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어" "네 모습을 알던 사람들이 네 이야기를 들으면 믿을 것 같아?" "이 가증스러운 인간아" "회심?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마귀당의 열성분자로서 그 누구보다 회칠한 무덤들을 양성하는 데 충실했던 당원! 마왕은 그런 저를 회유하기 위해 가지고 있는 모든 획책을 부렸습니다. (이것은 지금 글을 쓰는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 주여! 실족하지 않게 저를 붙들어 주소서!)

그러나 이번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 5장 1절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미 속죄받은 제가 아닌가! 당당히 죄악의 쇠사슬을 벗어던졌습니다. (저 같은 죄인까지도 십자가로 구속해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The 행복동길

3개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제 일상엔 전혀 일상적이지 않았던 것들이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몇 가지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눈을 뜨자마자 새로운 날을 감사하기. 처음에는 마음속으로 한 번 '감사합니다'라고 속삭였습니다. 얼마 뒤 '감사진법'이라는 고수의 노하우를 접한 후엔 세 번씩 입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삼창을 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래서 이제는 잘 때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결국 하루를 감사로 시작해서 감사로 마무리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때때로 이 햇병아리의 모습을 생각하며 입가에 미소를 짓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웃으면서 하는 감사삼창은 기쁨을 몇 배로 선사합니다.

  2. 아침에 화장실에 들어갈 때 나를 보면서 웃는 얼굴로 인사하기. "오늘도 멋지고 근사한 하루야!" "주님과 동행하며 기쁘게 즐겁게!" 작년부터 머리가 한 움큼씩 빠져서 여간 고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거울을 볼 때마다 짜증이 났었습니다. "나의 리즈시절도 이제는 저물어가는구나!" 그런데 요즘엔 이런 스트레스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 대신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너! 참 잘생겼다!" 동공 속에 비친 멋있는 그 모습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화장실 거울은 아침에 한 번만 보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매일 여러 번 그와 인사를 나눕니다. 하루가 다르게 더욱 근사해지고 있는 조지 클루니와!

  3. 유튜브에 들어가서 찬양 듣기. 한국에 와서 정말 놀랐습니다. 어찌나 많은 연주가들의 작품들이 있는지! 저는 이 행복의 보고를 매일같이 보고 듣습니다.

  4. 마음에 울림이 큰 곡들을 선정해서 사랑하는 두 아이들과 부르기. "내 영혼이 은총 입어"를 시작해서 어느덧 10곡이 넘는 컬렉션이 생겼습니다. 일 년이 지나면 찬양 앨범이 몇 개 나올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입가에 웃음이 피어납니다.

  5. 큰고모님과 카톡하기. 거의 날마다 그분과 국민 메신저로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50살의 조카와 75세의 고모 간의! 저는 현재 유일한 카톡 친구이자 신앙의 대선배인 그녀의 손을 잡고 이전에는 몰랐던 그 신비한 세계를 탐험하는 중입니다.

  6. 회심 전하기 (알았던 사람들에게). 이전에 아주 친했던 (근 십 년간 때와 장소, 그리고 종류를 가리지 않았던 술친구라는 의미에서) 중국인 친구에게 처음으로 저의 회심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도 설파했습니다. 어찌나 기분이 묘하던지! 그는 당장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고민해야 할 문제이지만 자신을 생각해 준 것에 대한 사의를 표했습니다. 저는 그가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저와 같은 길로 들어서기를 기도합니다.

  7. 인사하기 (몰랐던 사람들에게). 이것은 전도를 하려고 고민하다가 생각해 낸 것입니다. 요즘 저는 버스정류장에서, 편의점에서, 식당에서, 길가에서, 관공서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라고 문안을 드리는 중입니다. 정확한 통계는 내지 않았지만 대략 10명 중에 두 분은 제게 웃거나 감사하고 말합니다. 사실 그것을 기대하고 하는 것이 아니기에 상대방의 웃음을 보거나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아주 큰 기쁨이 생깁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다시 웃게 됩니다. 인사와 웃음의 선순환 뒤엔 감사함이 수반됩니다! 햄버거, 콜라, 그리고 감자칩이 세트이듯이 이 세 가지는 함께 합니다.

  8. 말씀 읽기. 이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2022년은 매월 성경 일독을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로 정했습니다. 지금까지는 딱 하루를 제외하고 정한 분량만큼 읽고 있는 중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고 또 그분의 뜻을 깨닫는 것에 모든 것을 쏟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있던 일입니다. 더운 곳에 사는 모리타니 친구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싶다고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용돈을 털어서 헌금을 드렸습니다. 이를 위해, 첫째는 우선 달러로 환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아이스크림을 대량으로 매입해서 택배로 보내자고 했습니다. 진지하게 토론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찌나 두 아이가 사랑스럽고 귀엽던지! 인생의 후반전! 행복동길로 비로소 접어들었습니다.


마지막 승부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디모데후서 4장 6절-8절

두 가지 소망이 생겼습니다. 첫째는 큰 고모님의 현재 나이가 되었을 때 같은 고백을 하는 것이고, 둘째는 두 아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같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 유혹과 실족의 지뢰밭이 도처에 깔려 있는 전선으로 또다시 들어섰습니다.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같은 메가톤급 시험에 빠질 수도 있는 위험지역입니다. 저의 필승 전략은 무엇인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앞으로 펼쳐질 수많은 전투에 임할 때마다 사수해야 할 승전 공식! 데카르트의 표현을 빌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사망한다. 고로 존재한다."

한 목사의 아들이자, 목회를 전공했던 신학도였으며 작은 개척교회의 전도사였던 어느 돌아온 탕자는 날마다 죽기를 소망하며 아래의 승전가를 부릅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이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 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아멘 아멘 아멘!"

PS. 감사처럼 아멘도 삼창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